日 과기정책 대부 "한국 정부, 무덤파고 있다" [이슈진단-③ 특별인터뷰]히라사와 동경대 명예교수 "현장 소통과 비전 없는 정책추진 위험천만" | |||||
지난 12일 백발이 성성한 일본인 과학자가 한국 땅을 밟자마자 내뱉은 탄식이다. 대전 현충원에 묻힌 故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을 참배하기 위해 이틀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히라사와 료(平澤 泠) 일본 동경대학교 명예교수. 히라사와 교수는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의 총괄정책연구주임을 역임했으며, 일본 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 탄생에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과학기술정책연구의 대부다. 지금도 현역으로 AIST의 2단계 정책조정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날리지프론트사의 대표이사를 겸직하는 등 기술경영론·시스템론의 세계적 석학으로 손꼽히고 있다. 바쁜 일정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전행 KTX 열차에 몸을 실은 그는 동승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한국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다"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는 현충원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여에 걸쳐 KAIST(한국과학기술원)-한국생명공학연구원 통합 문제를 비롯, 기관장 사표수리 등 이슈와 한국 과학기술 정책 전반에 대해 거침없는 직언을 던졌다. ◆다음은 히라사와 교수와의 일문일답 ○…새로운 정부출범에 따라 한국 과학기술계도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에 대한 소식이나 정보들을 접하신 적이 있으신지. ⇒물론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작고하신 최형섭 전 과기처 장관과도 10년을 넘게 양국의 과학기술 정책과 관련해 머리를 맞대온 친구 같은 사이다.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서는 늘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은 대통령 임기인 5년마다 과학기술계가 흔들린다. 한국 과학계가 실패를 향해 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떻게든 정부의 입김이 들어간다. 단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학기술 국가 역량을 쌓아올리는 것은 수십 년에 걸친 대계이고, 국가가 존속하는 한 영구히 지속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한번의 그릇된 변화에는 리커버하기 어렵다. 과학기술 육성에 대한 원리원칙을 확고히 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일본의 새로운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하는데 참여하고 있는 한 사람이자, 연구자로써 한국의 과학계 개혁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한국에서는 'KAIST-생명연 통합' 문제가 이슈다. 이와 함께 지식경제부 산하 출연연에 대해 AIST 체제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양 기관의 통합을 이인삼각 경기에 빗댄다면 파트너 간의 목적의식은 물론이거니와 비슷한 신체적 조건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일체가 되지 않는다면 다리는 꼬이게 마련이다. 물론 돈은 쓰겠지만, 연구자는 국가의 보물이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AIST 체제는 3년을 걸려 검토·수정한 정책일뿐더러, 지금도 2단계 수정이 가해지고 있는 등 과도기적 모델이다. 그것(통합)이 국가 연구역량을 신장시키는 방향이라면 원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문제는 확실한 목적의식이 있느냐다. 또한 현장의 목소리가 철저히 반영되고 있느냐의 문제다. KAIST와 생명연의 경우에는 당장 노동문제와 관련해 연구자들의 처우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연구자가 직장을 잃는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연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기가 떨어진 연구자는 단순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권 교체에 따라 정부출연연구소 등 연구기관 기관장들도 상당수 교체됐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본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나? ⇒적어도 내가 알기로 일본에서 그런 케이스는 본 적이 없다. 일본 말고 미국을 보자. 미국은 대통령이 바뀌면 과학계 인사는 단 3명이 바뀐다. 미국 국가과학재단(NSF: National Science Foundation) 장관, 부장관, 심의의장 등 컨트롤 타워의 일부만 바뀔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책 방향이 급선회하거나 하는 일도 없다. 연구현장의 직접적인 기관장들이 물갈이 되는 일은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고 기존 인사보다 최적의 역량을 갖춘 인사가 있다면 물론 반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책임하게 정치논리의 잣대가 드리워진 것이라면 제 무덤 파는 행위다. 전문지식과 로드맵에 대한 의식과 자질이 확실하다는 전제하에서만 OK다. ○…성과가 미흡한 연구에 대한 예산 축소, 가지치기 등도 검토 되고 있다. 기초·원천기술 투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는 반론도 들려오는데, 이에 대한 의견은? ⇒새로운 한국 정부의 이름이 '실용정부'라고 들었다. 정책전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과학정책에 있어서는 '실용'의 의미가 곡해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실용의 의미가 단시간에 승부를 걸려한다는 의미는 아닌데 말이다. 하위 과제 가지치기 등은 연구가치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있다면 반대하지 않는다. 단순히 투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면 이 또한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상이다. 일본의 예를 하나 들겠다. 일본에서도 불량채권 문제로 인한 경제 대란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정부는 다케나카 헤이조(竹中 平藏) 경제자문 등이 금융개혁안 등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단기 부양정책을 시도했었는데, 이 경제논리가 일본 원자력연구소에 적용된 적이 있었다. 연구소에서는 방사선을 이용한 강화소재 연구에 대한 물성연구가 진행됐었는데 투입대비 성과를 따지고 보면 별 것이 없었다. 원전 안전 등이 경제가치로 환산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고성능 강화소재 개발에 따라 원자력발전의 위험에 대한 보험금이 급격히 줄었고, 래디얼 타이어 제조 등에 이 기술이 응용됨으로써 지금은 수천억엔의 수익을 창출하고 있지 않은가? '아웃풋'(out-put) 계산법의 시대는 갔다. 한국도 '아웃컴'(out-come) 평가를 도입해야 한다. 아웃풋은 단순히 연구개발의 직접적인 성과, 예를 들면 논문발표, 특허출원, 국제규격 채택 등으로 평가를 실시한다. 그러나 아웃컴은 아웃풋의 결과물들이 활용되어 창출되는 사회·경제적 효과는 물론, 스핀오프 기술 개발 등에 따른 새로운 연구분야 개척 등을 모두 포괄한다. 콩기름 짜내듯 하는 방식으로는 연구자도 위축될 뿐더러, 콩을 심어 수확을 거두려는 발상도 낼 수 없다. ○…현재 한국에는 과학기술계를 대변하고, 일관된 정책을 꾸려나갈 만큼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 내가 대전으로 내려가는 이유는 존경해마지 않는 걸출한 과학계 리더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서다. 나는 1980년대 후반 최형섭 장관을 처음 만났다. 그는 내 스승뻘 되는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국가에 대한 과학자로써의 열정에 감복했고, 절친한 친구와 다름없이 지냈다. 그 후 최 장관이 타계하기까지 양국의 과학기술 정책과 발전방향에 대해 쉴 새 없이 머리를 맞대왔다. 최 장관은 최장수 과기처 장관을 지내는 등 높은 공직을 맡아왔으나 청빈으로 일관했다. 장관 시절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궁핍한 그의 생활을 보고 집 수리비를 보탤 정도였으니 말이다. 눈을 감은 뒤에도 작디작은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대단했다. 그를 따르는 과학계 중간리더들도 모두 그와 같았다. 흡사 메이지 유신을 이끌던 유신지사들의 사투를 보는 듯했다. 그가 눈을 감았을 때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도 했다. 지금 한국의 과학계 리더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과학을 잘 아는 리더가 없다면, 하물며 다른 고위 관계자들이 현장에 귀를 기울여야하지 않겠는가. 적극적인 소통과 연구현장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결여 되어선 결코 지속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
2008.06.16 00:00
[펌]日 과기정책 대부 "한국 정부, 무덤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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